[서울포스트 량기룡 기자=]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先農壇)은 왕산로 에 인근 용두동 과 접해 있다. 왕산로는 대한제국 때 의병장이었던 왕산 허위(旺山 許蔿)의 호를 붙인 것. 제기동(祭基洞)이라는 이름도 '제사를 지내는 터'라는 데서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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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새해 첫날 찾은 제기동 선농단 과 천연기념물 제240호 향나무 ⓒ20180101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2018년 1월 1일. 선농단을 불쑥 찾은 건, 나 개인이나 국가와 국민이 올핸 풍족해져 더 배불리 먹고 더 따땃한 날이 되길 바라는 의미가 크다. 언젠가 들렀더니 복원공사가 한창이었고 그전 옛모습 때는 좀 복잡해서 사진을 찍어두질 못했다. 오늘보니, 선농단 역사문화관 도 잘 준비해 자료들이 많이 축적돼 있다.
현재는'선농대제'도 복원돼 매년 거행된다. 오늘 한 바퀴 돌면서 지리를 훑어보니, 당시 한성동쪽 넓은 들판에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우측 서쪽에 사직단 이 있고 좌측에 종묘 그리고 멀리 평야지대에 선농단 을 두었다. 지금의 중랑구, 동대문구 사이의 한천(*중량포가 있었던 현 中梁川)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답십리,왕십리, 북쪽으로는 미아리,수유리까지 너른 평지에 물도 풍부해 경작지로는 적지였던 것이다. 더더욱 북한산이 명확히 조망된 자리에 제단(祭壇)을 잡은 셈이다. 조선(대한제국)말 순종이 친경(親耕)한 자료도 있다.
[* 조선때 '중량포(中梁浦)가 있어 중량천 이 맞다. 모든 조선시대 지도에 '중량(中梁)'으로 표시돼 있다. '중랑'이라는 소리는 지도에도 없고 일제가 독음 착오로 기록한 게 지금 중랑구가 되었다. 또 조선 때도 중랑(中浪)이라고 한 경우도 있다고 해, 중랑 이 맞다는 소리도 있으나 '가운데 물결' 이라는 '중랑'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필자 추측이지만, 당시 중량 을 중량 으로 썼으나 中梁 을 中浪 이라고 잘못 썼을 것이고, '浪'자를 원음인 '량(良)'자로 깜박 착각한 자료이거나 오독한 결과라고 본다.]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향나무는 생태가 매우 좋다. (기형적으로 자란 다른 향나무와 달리) 줄기가 곧고 가지도 왕성하다. 높이 10m, 가슴 높이의 직경 72cm(나무둘레 약 2.2m), 땅부터 쭉 뺃어오른 주줄기가 힘차게 보인다. 정확한 수령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나무가 있는 선농단이 1392년 지어졌던 것과 관련지어 볼 때 500여 년은 넘은 것으로 추정. 과거엔 측백나무가 빽빽이 둘러 있었고 그 아래 문인석1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대신, 그때 못본 청량대(淸凉臺)라고 새겨진 음각암석을 발견했다. 일제때 선농단을 불식시키고 의도적으로 청량공원으로 만든 증거라고 한다. 인근이 청량사라는 절에서 유래한 청량리 가 있기 때문이겠지. 자자한 명문이 많이 새겨져 있는데 판독은 못하겠다.
한편, 선농제가 끝나면 소를 잡아 푹 삶은 국물과 함께 참가한 농민들에게 국밥을 제공한데서 선농탕, 지금은 설농탕, 설렁탕 이 생겼다고 한다. 아래 김정호 의 대동여지도 에 나타난 재미있는 지명 - 왕십리(往十里),답십리(踏十里) 가 왕심리(旺深里),답심리(踏深里)로 돼 있다.
귀가길에 수퍼문(슈퍼문)이 2017년 12월, 2018년 1월 1일에 연이어 뜬다. 보통 때보다 약 15% 더 크다는 이 보름달은 지구의 공전궤도가 겨울엔 태양에 더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 선농단 참고할 옛 자료사진(넷에서 참고)
※ 선농단 (=자료 등)
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제사지내기 위하여 단을 쌓아놓은 곳. 사적 제436호. 면적이 3,933㎡, 단의 규모는 4×4m.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2동 274-1번지에 있다.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을 주신으로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1476년(성종 7)에 오늘날 제기동 부근에 관경대를 쌓은 것이 선농단이 되었다. 현재 선농단에는 가로 세로 4m의 제단과 문인상만 남아 있다.
선농의 기원은 멀리 신라 시대까지 올라가는데,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태조 이래 역대 임금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를 지냈다.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에서 왕이 직접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백성에게 농사일의 소중함을 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 친경 행사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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