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분노의 두 흔적, 세인트 헬렌스 화산과 5.18 광주
-SPn 서울포스트, 권종상 자유기고가
1980년 5월 18일. 남녘 빛고을에서 공수부대가 광주에 진주, 조선대와 전남대 등에 진주하고 나서 거대한 비극의 서막이 열리고 있을 즈음, 미국 연방정부 소속의 지질학자들은 이제 곧 일어나게 될 거대한 자연현상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 몇 주 전부터 계속 동북쪽 면이 융기하며 폭발의 조짐을 보이던 워싱턴주의 세인트 헬렌스 산 근처에서는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고, 뭔가 거대하고 공포스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일대엔 소개령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일부 주민들은 "내가 평생 이 산에서 살아왔다. 이제 이 산과 함께 죽을 것"이라며 소개령을 거부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 80년 5월 18일 이 산은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하며 동북쪽 사면이 무너져 내립니다. 인류가 역사를 남기기 시작한 이래 관측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산사태가 함께 일어나고, 원래 만년설과 빙하에 덮여 있던 이 산에서 일어난 폭발과 화산재 분출은 곧 화쇄류, 그리고 라하 Lahar 를 만들어 냅니다. 화산재가 대규모로 섞여 녹은 만년설은 말 그대로 '콘크리트의 급류'가 되어 앞에 거치는 것을 모두 쓸어버리며 계곡을 새로이 깎고 기존의 계곡을 덮어 버립니다. 폭발의 규모에 비해 인명피해는 비교적 적었지만, 엄청난 재산 손괴와 동식물의 피해가 일어납니다. 거대한 산사태는 산 속에 있던 호수를 갑자기 쓸어버리며 역시 '인류가 목격한 가장 큰 민물 쓰나미'를 만들어 냅니다. 산사태의 위력은 산등성이를 일곱번을 넘어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고, 폭발 순간에 그 충격파로 인해 밑둥이 부러져나가며 날아간 나무들이 건너편 산으로 넘어가 추락했고, 이 부근은 화성에서나 볼 수 있을 풍경으로 변해 버립니다.
폭발 순간의 참상은 영화 '단테스 픽'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산의 폭발 순간이 궁금한 분은 이 영화를 통해서 그 순간을 간접경험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른바 '파이로클래스틱 형식의 폭발'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를 공중으로 날렸고, 햇빛은 금새 가려졌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구조물들도, 이 화쇄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높이 수십 미터의 콘크리트 다리들이 몇 초만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화산재는 포틀랜드와 야키마 지역에 눈처럼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대자연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시애틀은 이른바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저는 지금까지 세 번의 지진을 경험했고, 이곳엔 언젠가 진도 9가 넘어가는, 이른바 '빅 원'이 올 것이라는 예상은 지질학자들 사이엔 정설처럼 되어 있기도 합니다. 시애틀에서 겨우 몇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의 화산 폭발은, 현재 시애틀-워싱턴주의 상징이라고 불리우는 레이니어 산도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과학자들도 이 산이 폭발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옐로우스톤 국립 공원이 사실 거대한 화산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인트 헬렌스 산은 그 이후 필리핀에서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가장 큰 화산 폭발이었습니다.
그 날짜가 가진,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상징성 때문에 오리건 주에 거주하는 시인 오정방 씨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일어난 비극에 이 땅의 산이 결국 그 아픔을 못 이기고 폭발하고 말았다"고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산이 보여준 그 거대한 자연의 힘, 그리고 그 때문에 벌어진 비극들 때문에도 그렇지만, 제가 이 산이 폭발한 그 날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80년 오월 광주'의 그 날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한국으로 귀국하신 이모와 이모부를 모시고 이곳의 마지막 관광 코스로 잡은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예전에 둘째 이모 내외도 이곳으로 모시고 간 적이 있지만, 몇년만에 다시 보니 새로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몇년만에 이곳에 다시 새로 자라고 있는 생명의 흔적들이었습니다. 거대한 폭발과 그 안에서 소멸했던 생명은 34년이 지난 지금 천천히 스스로 복원되고 있었습니다. 그 자연의 치유력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자연 앞에서 하찮은 존재인가, 그러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이 자연에 해악을 끼치고 사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활화산 같은 분노'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정말 활화산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세인트 헬렌스 화산입니다. 하와이처럼 용암이 늘 흐르는 화산과는 또 다른 화산입니다. 지구는 아직 불안정하고, 그 불안정함 속에서 우리는 마치 우리가 안정적으로 사는 듯 착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지구는 항상 끓고 있고, 우리의 가슴도 끓고 있습니다. 그 압력이 어딘가에서 터져나와야 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활화산같은 민중의 분노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자꾸 그런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시애틀에서 가려면 운전해서 세 시간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됩니다. 이곳은 '국립 공원'이 아니라 '국립 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구요. 미국 대자연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혹시 시애틀에 오시는 분들이라면 꼭 보고 가시길 권합니다.
시애틀에서...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권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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