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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남한산성 기행 - 당신의 성(城)은 안녕하십니까
 나종화 객원기자 (발행일: 2014/01/17 20:24:07)

[탐방] 남한산성 기행 - 당신의 성(城)은 안녕하십니까
-SPn 서울포스트, 나종화 객원기자


▲ 무수한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뽐내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어장대에서 한국혼이 느껴집니다.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 소설 [김훈] 남한산성중에서 -

▲ 남한산성 설계자는 여기 연주봉 옹성에 만리장성 이미지를 넣고 싶었나 봅니다.

군복무시절엔 남한산성을 무시무시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군에 다녀오신 분들은 공감 하시겠지만 한때는 남한산성과 국군형무소가 동의어로 사용되었거든요.
남한산성에 근무하면서 사형집행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예비대에서 만난 한 병장의 얘기를 듣고 더 으시시하게 느껴지던 곳입니다.

서울 생활을 하게 된 다음부터 남한산성은 닭백숙을 먹으러 가거나 여름철이면 한적한 골짜기를 찾아 발이나 담그고 오는 유원지쯤으로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저는 김훈의 소설속에 담겨있는 또 다른 남한산성을 만나게 됩니다.
책을 읽고 난 다음 명치끝이 절절하게 아려오더군요.
역사의 비극과 한민족으로서의 모욕이 각인된 그곳을 암 생각없이 희희낙낙하며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남한산성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쉽사리 그쪽으로 발길이 가질 않데요.
차일피일 미루다가 산행겸 해서 아내와 함께 그곳을 찾았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좋아하는 까닭은 과거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념의 유희를 즐길 수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번 남한산성 기행에선 그럴 수 없었습니다.
1627년과 2014년이 너무도 닮아있었기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처해있는 상황도 그렇구요.

▲ 소나무와 어울어진 남한산성의 멋은 유장함이었습니다. 시절과 상관없이 성곽을 흘러간 세월의 유장함도 느껴지구요.

힘은 쇠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대륙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는 명나라와 요동을 장악한 이후 중원을 향해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여진족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청나라)사이를 줄다리기 하며 광해는 지혜로운 외교를 펼쳤습니다.

당시 조선이 후금의 등뒤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행보에 따라서 중원의 주인이 가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었지요.

그리고 조선의 입장에서도 친명을 표방하고 명황제를 천자로 칭하며 사대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후금과 맞짱을 떳다가는 임진왜란 후휴증에서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백전백패지요.

그래서 광해가 후금과도 돈독한 친구관계를 유지한 것은 명분보다는 실사구시를 쫓는 참으로 현명한 조치였다고 훗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조선의 명과 후금사이의 등거리 외교도 막을 내립니다. 감히 천자의 나라인 명나라와 척을 지고 있는 오랑캐와 형제니 친구니 운운하는 불경을 범한 것도 인조가 광해를 몰아낸 중요한 명분이었으니까요.

인조는 향명배금(向明排金), 즉 명나라는 더 가깝게 하고 후금과 대립각을 세우는 외교정책을 펼칩니다. 당연히 후금은 이러한 조선에 대하여 크게 반발했지요.

맥아리가 빠진 호랑이 같은 명나라에 일격을 가해서 끝장을 내려하는 후금 입장에서는 자신의 등 뒤에 조선이 버티고 있으니 거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다가 씨알이 먹히지 않자, 후금은 인조가 즉위한지 4년째 되던 정묘년에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와 단숨에 평양성을 점령하고 조선의 목에 칼을 드리댑니다.

“ 시키는데로 안하면 죽여버릴꺼여 ”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까지 도망간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듭니다.

“ 알았어. 알았어. 우리는 칭구고 형제자나. 지금부터 잘 지내보자고...”
그런 조선에 대하여 후금은 이런 저런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잔뜩 내세우며 배후에서 자신의 등을 치지 못하도록 손발을 꽁꽁 묶어놓습니다. 안 그래도 혐오스러운 오랑캐 색기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도 속상해 죽겠는데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 이것 주라 저것 주라 달달볶아대는 후금을 향해서 인조는 에라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싶은 심정으로,

" 요 썅노무 호로 색기들아, 해볼테면 함 해보자" 하고 댓거리를 합니다.
후금은 요런 싸가지 없는 조선의 버르장머리를 확실하게 고쳐줄 요량으로 인조 14년 병자년인 1627년 12월 청태종이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꽁꽁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득달같이 들이닥칩니다.

10년전에 당해놓고도 '설마 또 오겠어 '하며 별 대책없이 버티던 인조는 우왕좌왕 갈팡질팡 하다가 강화도로 도망갈 기회 마져 놓치고 남한산성으로 줄행낭을 칩니다. 당시 남한산성엔 신하들과 병사 그리고 원래 거주하던 주민을 합쳐서 1만 2천명 가량이 남한산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식량은 고작 50일분 밖에 비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적을 한군데로 몰아놓았으니 급할 것 하나 없는 청나라였습니다.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아침저녁으로 대포를 쏘아대는가 하면 밤이면 그들의 주특기인 피리를 불어대며 성안에 있는 인조를 비롯한 조선군의 피를 말리는 심리전을 구사합니다. 관군과 의병들이 전국방방곡곡에서 벌떼처럼 달려와서 한방에 오랑케들을 물리칠꺼라고 기대했는데 그들마져 파죽지세로 깨지고 설상가상 강화도에 피신했던 왕자와 비빈들까지 청나라 군영으로 잡혀옵니다. 그야말로 남한산성은 끈 떨어진 연같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고 말지요.

▲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걷다가 처음으로 카메라를 꺼냈던 출발지였던 동문에서 약 1 KM 떨어진 지점입니다.

김훈의 소설은 그런 암담한 상황에 처해있는 인조와 주전파인 김상헌, 주화파인 최명길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지요.
김상헌이 말합니다.
“ 끝까지 싸웁시다. 그리고 장렬하게 죽읍시다. 그것이 저 오랑개 색기들한테 수모를 당하면서 사는 것 보다 낫습니다. ”

최명길이 말합니다. “ 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오랑캐한테 수모를 당하더라도 살아있어야 앙가픔을 할꺼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야 조선이 살고 백성이 삽니다. ”

인조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전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합니다. 과연 목숨 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 맞나 싶을 만큼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지요. 400년이 지난 지금 와서 돌이켜 봐도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인조임금이세요.

결국 성문을 열 수 밖에 없었지요. 송파로 내려가서 청태종에게 아홉 번 머리를 소리 나게 부딪히는 절을 하면서 종묘사직과 목숨을 구걸합니다. 인조의 이마에선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삼전도의 모욕!!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모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성곽을 돌면서 그날의 역사를 곱씹다가 울화통이 터져 인조임금이 눈앞에 계시면 조선시대였다면 당장에 참수감이겠지만 불충을 무릅쓰고 삿대질을 해대고 싶었습니다.

“ 전하께옵서는 바보 아닙니까? 아니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캐스팅보드 그 말이 뭔 뜻인지 잘 모르시면 꽃놀이 패를 쥐고도이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일을 당하십니까?
만약 정말로 여진족들과 한 판 붙을 맘을 자셨다면 일단 군사력부터 갖추시고 치밀한 준비부터 하셨어야지요.
명나라 수군들도 불러서 요소요소에 배치해 두셨어야 했구요.
저 같으면 무술이 뛰어난 자들로 특수부대를 조직해서 압록강을 건너가 후금 진영 깊숙히 침투해서, 우두머리 몇 놈 본보기로 치면서 오랑케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놓았을 겁니다.
“ 니네들 조선땅 넘보면 죽는다. ” 이런 공포심을 심어놓을 필요도 있거든요.
허구헌날 신하들 의심이나 하고, 서로 쌈이나 붙이면서 무슨 용가리 통뼈 삶아 자셨다고 힘도 없으면서 숭악한 북방 오랑캐들에게 엉기냐구요.
그렇게 해서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당하신 것은 죄다 전하의 자업자득의 소치라고 아룁니다. ”
전하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느냐구요. ”

2014년의 대한민국은 1627년 남한산성에 고립무원의 신세로 여기 남한산성에 갖혀 있던 인조 왕조때 보다는 안녕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의 보안관임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미국, 국력이 날로날로 급팽창하고 있는 중국,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막강한 군사력의 일본,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북쪽의 김정은 정권에 둘러싸여 있는 대한민국, 내일도 모래도 과연 안녕하실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옆에서 아무리 떠들어 대도 인조 임금이 그랬던 것 처럼 ‘뭐 별일 있겠어’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고 굶주린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권력을 탐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어쩌면 병자년 그 때와 많이 닮아 보입니다.
그래서 과연 내일도 모래도 여전히 안녕 하실지 누가 보장해 주겠습니까.

2014년 부터 한반도 주변에 새로운 기류들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군사대국화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정은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 우리를 툭툭 건들고 있습니다.
북한은 빠르면 5년 이내 아니면 10년 이내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부실한 건축물입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으로 편입되면서 저절로 통일이 되고 우리는 대박이 날까요?

꿈에서 깨어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자국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마각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한반도에는 병자년 못지 않은 소용돌이가 일어날 것이구요.

정치나 외교 그리고 국방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구요?
천만에요.
멍때리고 있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때 오랑캐가 휩쓸고 간 조선땅에 살던 민초들 보다 훨씬 더 처참한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격동은 우리민족에게 절호의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지혜를 발휘한다면 한반도에 결집된 강대국들의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우리것이 되고 통일한국은 동북아 역사상 유래없는 강대국으로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단언컨데 앞으로 100년후 그런 대한민국은 일본을 훨씬 앞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편은 오직 우리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뼈저리게 자각해야 합니다.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를 선택해야 하는 병자호란, 임진왜란, 경술국치, 한국전쟁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새벽별처럼 성성히 깨어있어야 한 다는 것을 남한산성을 돌면서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 남한산성엔 다섯개의 옹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병자호란을 겪고 난 다음 철옹성으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생긴 산물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때문인지 예전과 달리 깔끔하게 단장되었더라구요.

옹성의 길이를 제외하면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8 km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옹성과 봉암성을 들낙거리다 보니 트랑겔 기준으로 얼추 12 km를 걸었네요.
오랜만에 긴 거리를 걷는 아내는 피로감을 호소했지만 저는 딱 좋았습니다.

▲ 평화에 이르는 문이라는 뜻을 가진 남문, 남한산성의 비극을 겪은 이들에게 평화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었을 까요.
▲ 평화 그거요? 비쌉니다. 댓가를 치뤄야 얻을 수 있습니다. 힘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구요. 우리 시대의 문제점은 평화의 가치를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 저 소나무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는 1627년 북풍한설 희몰아 치는 남한산성의 울음을 함께 울며 지켜봤겠지요.
▲ 아직 멀었어요? 반은 왔어. ( 거짓말을 좀 했습니다. )
▲ 수어장대가 있는 위치가 청량산이던가요? 이번에 돌아보니 남한산성에서 산봉우리는 큰 의미가 없더라구요.
▲ 수어장대를 지키던 장수들은 밤 사이에 산 기슭까지 새까맣게 덮고 있는 청군의 진영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다고 합니다.
▲ 무망루라는 편액은 인조의 통한과 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효종을 생각하며 쓴 영조의 글씨라고 하는데 공감 100%입니다.
▲ 청랑당은 남한산성 축조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입니다. (공금횡령 누명은 벗었으나 이미 참수됨)
▲ 고풍이 물씬 풍기는 서문이 네 문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습니다.
▲ 문수봉에서 내려다본 남한산성 북쪽입니다. 왼쪽 가장 높은 봉우리가 벌봉일 것입니다. 청군이 성안으로 포를 쏘아 대었다는...
▲ 북문까지 왔으니 동문이 지척이려니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아닙니다. ㅎㅎ
▲ 남한산성은 봉암성이라는 또 하나의 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로 연결되는 문입니다.
▲ 남한산성엔 봉암성 외에도 한봉성과 신남성같은 성들이 함께 있습니다.
▲ 저 홍예문을 넘어서면 봉암성입니다.
▲ 청군은 저기 벌봉에 포대를 설치해놓고 간헐적으로 성안으로 포를 날려대며 공포심을 극대화 하였습니다. 일종의 심리전을 펼친 것이었죠. 이곳 봉암성은 그 일을 겪고 난 다음, 사후 약방문격으로 벌봉 인근까지 확장된 성입니다. 조선의 호흡이 서려 있는 이 허물어진 성곽이 주는 느낌이 최근 복원된 남한산성이 주는 느낌에 비해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 한산을 향하여 견고한 포대가 마련되어있는 것을 보니 그쪽에도 청나라의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 황진이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송암정터에 고사목 한그루가 묘비처럼 서 있네요.
▲ 해발 400미터에 설치된 산성인데도 성안쪽은 마치 분지처럼 편편해 보입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신년들어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제 자신과 주변의 문제
안팍에서 일어나는 격랑속에서 표류하는 대한민국의 시국에 대한 상념을 안고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고 난 다음 머리속에 떠오르는 글귀입니다.
제 성(城) 즉 건강, 재정, 주변과의 관계가 안녕해야
이웃의 안녕에도 기여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2014년을 맞이하여 마음속에 품은 사자성어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입니다.
헛생각 하지 말고 한눈팔지 말고 제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자고
다짐했답니다.

아내와 함께 오랜시간을 걷고 ,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으로 외식도 하고
여러모로 의미있었던 외출이었습니다.

▲ 다시 동문으로 돌아왔을땐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종화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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