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공산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 (예문 참고)
|
▲ 너무나도 잘 알려진 남미의 사회공산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아래로↓) |
(↑위로부터) 23살의 의대생 어네스토 게바라가 친구이자 선배인 생화학도 알베르토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부터 칠레, 페루, 콜럼비아을 거쳐 베네주엘라까지 장장 13,000 여 킬로미터를 7 개월에 걸쳐 여행한다. 처음 한 대의 낡은 모터사이클에 몸을 싣고 떠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사고로 모터사이클을 잃고 걷기도 하고, 뗏목도 타고, 여러가지 수단으로 여행을 계속한다.
영화는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뜨 계급의 한 의학도가 자신의 우물을 뛰쳐나와 세상을 겪으며 그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나환자촌 산 파블로. 감염을 두려워하는 의료진들은 강 하나를 두고 이 편에, 나환자들은 저 편에 살고 있다.
그 나환자촌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의료진을 뒤로 하고 그는 헤엄쳐 강을 건너간다. 자신이 있을 곳은 이쪽이 아니라 강 건너, 저 나환자들이 있는 곳이라면서 ... 이미 그 때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리라. 어네스토 자신을 참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그 버림받은 나환자들 편에 서기로.
이들이 여행하던 1951년 12 월 부터 1952년 7월 까지 우리의 한국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치열히 벌어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전쟁. 한국 전쟁의 소식을 들으면서 체 게바라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2007년 3월) 서울 일상의 기록 -
|
▲ 반FTA집회 자료사진 |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 게바라-
휴일에도 일거리가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다. 비록 많은 수입은 아니지만 오라는 거래처가 있고 달려갈 곳이 있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다. 셈을 할 수 없는 이 세태에서 그들이 나의 빛이요, 나의 생명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연구하고 충분히 노동한 사람들에겐 더없이 달콤한 휴일.. 그러나 적지 않게 그런 날에도 따분히 지내야하는 사람에 비한다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느끼고 싶을 때 또 달린다. 그래서 세상은 늘 나에게 신비스런 파노라마요, 네버 엔딩 스토리다.
동대문에서 종로길을 타다가 길이 막혀 을지로로 들었다. 롯데 앞에서 모 방송국장님에게서 전화 한 통 받고 시청앞에서 서소문로로 들었다. 도심은 토요일인데 차가 꽉 들어 서 소통이 엉망이었다. 시청광장에 전경버스가 수 십 대, 시내 한 복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3월 초순을 넘기는데 올 겨울을 연장해서 얼음까지 언 가장 추운 날이다. 엊그제는 함박눈 펑펑 맞으면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오늘은 바람이 광풍이니...(하긴 지난 겨울엔 눈 한 번 둘러 쓰지 않고 너무 편하게 벌어 먹었다.) 이런 날은 눈 똑바로 치켜 뜨지 않으면 낭패보기 쉽상이다.
충정로길로 아현로로 마포로에 당도했다. 내 거래처는 언제나 불빛이 먼저 반짝반짝 나를 반긴다. 전에 집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거래처 입구에서도 기도하며 들어 가라고..하여 나는 '그들이 많은 돈 벌어 건강하고 그들의 삶이 평안하라고...' 하여, (매양 그렇지는 않지만) 가게 앞에 쓰레기가 있으면 줍고 치우기도 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들은 나에게 사랑을 돌려 주었다. 식사 때면 밥먹고 가라는 데가 대부분이고 바쁘다면 음료라도 꼭 챙겨주기까지 한다. 짬나는 시간에 이 얘기 저 얘기. 그 장소 아니면 만날 일도 없는 모래알 같은 사람들이지만 나에겐 일상을 함께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한달에 몇 번은 가슴이 덜컹 내려 앉을 것 같은 천상의 님프를 보는 착각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요런 날은 온갖 상상을 다 해보고 (내가 응큼한가?) 거래처를 옮겨 가면서 '이렇게 천사같은 마담을 사랑해보고 싶소'라며 손을 내밀다 보면 앞에 차가 떡 버티고 있어 사고가 날 뻔도 했다. 리얼리스트, 또 불가능한 꿈을 꾸다가...
다시 광화문으로 향하는 대기는 매서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대문 고가를 타는데 아니나 영업용 택시가 푹 끼어 든다. 이런 경우를 자주 겪는데 사고 판례나 보험 적용도 염치없이 끼어들거나 튀어 나온 차를 뒤에서 박아도 박은 차의 과실을 제로로 해 줌은 물론 박은 차까지 보상해 줘야 교통 질서가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마치고 녀석을 앞질러 가장 인간적으로 '씨벌눔, 콱~~'하고 쏘아 줬다(듣거나 말거나).
광화문 네거리를 관통해서 종로1가에 들어 오니 물바닥이다. 종각을 전경들이 켜켜이 에워 싸 있길래 거기서 잠시 멈췄다. 한총련까지 가세한 반 FTA연합 집회였다. 종각 사거리는 빼꼼할 틈이 없을 정도로 경찰버스가 대기해 있고 불빛에 빛나는 헬멧사이로 집회자들의 간헐적인 외침을 바람이 실어온다.
"..나라...말...아...먹...은...정..부는..."
기자들은 사다리에 올라타고 취재경쟁을 벌이는데 (느그들한테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먹고 살아야 하니 느그 기사 좀 가져다가 편집해 쓰겠다.) 내가 못하면 우리 신문사도 이렇게 얼음 어는 겨울날 박터지게 뛰는 기자가 몇 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기자란 몸으로 부딪히고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며 냉철한 머리로 써내야 하는데...저들은 돈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러겠지... 이라크에서 종군하다 죽어가는 기자들은 회사에서 돈을 줬기 때문인가? 그랬겠지...
나는 영국의 데일리메일 사장이 사세확장을 위해 새벽 눈비 맞으며 신문이 젖을까봐 온 몸으로 가려 뛰었다는 것을 30여 년 전에 배웠으며, 광주사태 때 아사히 신문기자가 계엄군이 쏜 최루가스에 앞을 보지 못하면서 카메라를 뺏기지 않을려고 몸으로 저항했다는. 그들은 모두가 사명감으로 멀쩡하게 미쳐있다는 것을.
다시 청량리로, 망우로로, 묵동을 거쳐 집에 와 신문을 보니 '경찰, 종로일대 시위군중에 물대포 발사...', '반FTA 진압현장서 연합뉴스 기자 등 8명 전경에게 폭행당해...'
이미 연합뉴스 반열(?)에 오른, 30여 년 역사 서울포스트의 양기자도 얻어 맞을 뻔 했군. (궁시렁 궁시렁~~)
◆ [데일리메일 Daily Mail www.dailymail.co.uk] (인터넷 검색)
|
▲ 데일리메일 인터넷판 |
영국에서 발행되는 조간신문.
1896년 노스클리프 자작이 런던에서 창간하였다. 지면은 8면이었으며 1부당 1/2페니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이 신문은 1787년에 창간된 《헐 패킷 Hull Packet》이 그 모체인데, 《헐 패킷》은 1884년에 《헐 이브닝 뉴스 Hull Evening News》에 흡수되었으며, 12년 후 런던으로 옮겨와 《데일리 메일》이 되었다. 1면에 광고를 싣는 전통적 지면 형태를 유지하면서 간결한 뉴스 기사, 흥미 위주의 읽을거리와 요리·패션·여성란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사면을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보수주의적인 사람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으나, 신흥 중산층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독자층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근대 대중 저널리즘의 선구가 되었다.
창간호는 40만 부 가까이가 팔렸고, 4년 후에는 70만 부로 그 판매부수가 급신장하였으며, 재정의 충당은 신문판매 수입보다는 광고수입에 의존하였다. 1922년 노스클리프가 죽은 후 회사의 소유권은 동생인 H.로더미어로 넘어갔다. 1924년 170만 부, 1929년 190만 부 등으로 그 발행부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1920년대에는 영국 신문계에서 최대의 발행부수를 차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로더미어의 둘째아들 V.함스워스가 경영권을 계승하여 회사 이름을 '어소시에이티드 뉴스페이퍼(Associated Newspaper)'로 고쳤다. 1967년에는 발행부수가 225만에 달하였고, 1971년에는 《데일리 스케치》를 흡수·합병하였다. 한때 침체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영국 대중신문의 선도적 위치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