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더위 끝 덕양산(행주산성)에서 본 북한산국립공원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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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외곽 4산(외사산 外四山) 중 하나인 서쪽 덕양산에서 본 북한산국립공원. 덕양산은 행주산성으로 더 알려졌다. 좌측 멀리 도봉산에서 백운대로 이어져, 다시 문수봉,보현봉을 거쳐 우측 끝 형제봉에 닿는다.(큰사진) ⓒ20130831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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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 용마산에서 본 북한산국립공원 ⓒ2012 서울포스트 자료 |
폭염이 계속되던 며칠 김포를 다니며 올림픽대로나 자유로, 순환도로에서 본 북한산의 뒤태가 아름다웠다. 오후 햇살을 받은 독바위(돌바위)들은 황금색으로 빛나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대비를 이룬다. 북한산은 동남쪽은 숲이 짙지만 북서쪽은 저렇게 바위투성이다.
쉴 때 고양쪽 전망 좋은 산에 올라 실컷 요기하겠노라고 생각했던 터, 마치 서울의 외사산(外四山)이 생각났다. 조선초 한양천도를 계획하고 이성계의 책사 정도전이 설계했다는 서울. 무학대사의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에 대문과 소문, 성곽 등이 축조되었다. 현재 서울성곽은 동 - 낙타산(駱駝山 또는 낙산(駱山) 125m), 서 - 인왕산(仁王山 338m), 남 - 목멱산(木覓山 또는 남산(南山) 262m), 북 - 백악산(白岳山) 또는 북악산(北岳山) 342m)을 잇는 그때의 길이다.
이것이 시대는 불분명하나 후세 풍수가에 의해 궁을 둘러 싼 내사산(內四山) 이며, 한성의 외곽 외사산 도 정해졌다. 외사산은 동 - 용마산(龍馬山 348m), 서 - 덕양산(德陽山 124m), 남 - 관악산(冠岳山 632m), 북 - 북한산(北漢山 836m)을 각각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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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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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김정호 1861년. 한강에 자양동 부근, 중랑천 하류에 섬이 있으며 난지도도 섬이었다. ⓒ자료 |
그 서쪽 덕양산을 찾기로 했다. 덕양산은 행주산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부터 한양(漢陽) 부근에는 양주(楊州),광주(廣州),행주(幸州),견주(見州) 등의 고을이 있었으나 행주는 고양시, 견주는 양주에 포함되었다. 버스로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을 지나 행신역앞에 내려 걸었다.
...지금은 벽해상전 이 된 행신리에 관한 기억부터 내 서울은 시작된다. 90년 12월 서울로 올라와, 91년 1월 여기 행신리(幸信里) 판자촌에 들어왔다.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어 친구가 권한 곳. 신촌이 가까워 거기 직장 친구를 만나고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들과의 소통도 용이할 위치였기에. 일을 보고 행신리 잠터에 들어가면 용역들이 판자집을 다 부숴놓곤했다. 노태우 정권 때 주택 200만호 건설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견디다 못해 살구꽃 핀 봄날 빈 몸으로 떠나... 등등,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사이 행주산성 앞에 도착했다. (한양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한 외사산 덕양산은 포털 지도에도 표시가 없다. 이도 서울포스트 가 관악산을 629m에서 632m로 고쳤듯 수정 의뢰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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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지리에서는 도봉산을 태조산(太祖山), 북한산 정상부 일대를 중조산(中祖山), 보현봉을 소조산(小祖山) 이라하여 주산(主山)으로 보며, 관악산을 조산(朝山)으로 본다. ⓒ2012 서울포스트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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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덕양산과 멀리 관악산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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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권율(權慄 권률)장군의 행주대첩 은 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번지.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1593년(선조26) 권율 장군이 이끈 2,300여 민관군이 왜군 3만여명을 물리친 곳이다. 아낙들이 치마에 돌을 날랐다는 일화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행주대첩비는 3개로 선조35년에 세워진 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74호)는 비각에 보존되고, 헌종11년 중건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72호)가 있으며, 이 터 대부분 6.25로 파손돼 1970년 재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가 있다.
입구에 1986년 세워진 충장공 권율 도원수 의 동상과 항전 모습을 조각한 부조가 있으며, 권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忠壯祠,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 등이 있다. (* 동명의 충장사 는 전라도 광주 무등산에도 있으며 임진왜란 때 김덕령 의병장을 기리는 사당. 광주시내 한복판 충장로 도 거기서 땄다. 또 충남 논산에 있는 충장사는 문화재청 등록된 백제 계백장군의 표준 영정을 모신 사당)
* 잠깐 광고 : 시급히 고쳐야 할 국문법 - 두음법칙, 사이 시옷(ㅅ), 모든 단어 띄어쓰기 등
나는 오래동안(오랫동안) 지이산(智異山)을 왜 지리산(智異山)으로 쓴 지 몰랐다. 알고보니 '이(異)'자가 '리(異)'자 인 것이다. 따라서 두음법칙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문법이 아니라면, 이유,이견 등은 리유,리견 으로 써야 맞다.
영어는 발음하기 편하게 묵음을 적용하고 원 음소는 그대로 표기한다. 예로 physical 을 '피히지컬'이라하지 않고 '피지컬'로 발음한다. 피지컬 로 발음하기 쉽다고 'pysical'로 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발음을 쉬게하기 위해 원음소를 고쳐버린다. 오늘 본 '권율' 장군도 교과서에 그렇게 쓰고 배웠지만, 1979년 10월에 옮겨 새긴 '행주 대첩비'문에는 '권률'장군으로 돼 있다.
두음법칙이 적용된 내 이름은 '양기용(梁奇龍)'이나 '원래 '량기룡'으로 써야 맞다. 중국의 유명 배우 '량자후이(梁家輝 량가휘, 양가휘)'나 '량차오웨이(梁朝偉 량조위, 양조위)와 동 씨며 '청룽(成龍 성룡)'처럼 '룡'자를 쓴다. 그러나 우리 문법(ㄹ,ㄴ 이 ㄴ,ㅇ 으로 된다는)대로라면 '냥기뇽'이 될 수도 있다. 영어는 'R(ㄹ)' 그대로 발음하면서 말이지... 양(楊)씨 와 양(량梁)씨가 결코 동 성(姓)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야 알았으니 국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 훈민정음도 표기는 원칙대로 하고, 발음은 혀 짧은 사람은 혀 짧은 소리 내도록 놔둬도 된다. 그래도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다. 우리 언어가 이처럼 혼선을 빚는 것은 천년 만년 쓰겠다는 것이 아니고 대충 사용하겠다는 뜻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빨리 뜯어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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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양산에 있는 행주산성 유적지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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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 '기'씨. 고등학교 때 잘난 선배가 이 성씨여서 담아보았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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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성 ⓒ서울포스트 |
대학수능에 한국사 필수 과목 지정
조선의 한양 천도 얘기가 나왔으니,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도 알아봐야겠다. 2017년부터 '한국사의 대학수학능력시험 필수과목 지정'이 세대별로 호응도 차이가 있다고 하나, 국사는 국어와 함께 객관적으로 바로 서야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는 없고, 그냥 '고려(高麗)'다. 삼국은 '고려,백제,신라'였고, 신라가 통일한 후, 후삼국을 거쳐 고려 가 건국된다. 고려의 건국이념은 옛 삼국시대의 고려를 승계한다는 취지였으며, 역사는 편의상 통일고려와 삼국시대의 고려를 구분하게 위해 삼국의 고려를 고구려 라고 기록하고 부르고 있다. 충주에 있는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 중원 고구려비) 에도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고조선(古朝鮮)도 원래는 그냥 조선이나, 이성계의 '조선(朝鮮)'과 구분하기 위해 우리 역사서는 그렇게 표기한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된 어지러운 중원대륙과 함께 고려도 국운이 기울어 신흥사대부 출신 이성계 장군이 1392년 7월 17일, 공양왕(재위 1389~1392) 뒤를 이어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 35대 왕위에 올라, 원나라부터 계속된 관행으로 명나라는 '고려국 권지국사(高麗國 權知國事)'로 승인했다.
사신을 보내 명나라 황제에게 '새 국호(조선 朝鮮)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사용'을 위한 고명(誥命, 천자가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을 요청했으나, 국호만 승인받아 1393년 2월 15일에 '조선' 으로 개국한다. (역사에서 조선 건국은 이성계 집권인 1392년 7월 17일로 봄)
자료에 의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는 결국 명나라로부터 고명을 받지 못하고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로서 고려시대 후기 고려국 국왕의 용포인 청룡포(靑龍袍)를 착용했다.
1403년(태종 3)에 3대 태종이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아 왕호를 쓰기 시작했고 조선국 태조,정종,태종,세종도 청룡포, 세종 26년(1444) 조선국 국왕의 시무복으로 홍룡포(紅龍袍)를 입기 시작하였으며 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 건국 후 1대 고조 광무제,2대 순종 융희제가 황룡포(皇龍袍)를 입었다.
고려말,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과 신돈 그리고 사대부 이성계 일파
고려 공민왕에 이르러 국정이 혼란이 극에 달하던 중, 승려 신돈이 등장한다. 신돈은 공민왕의 절대 신임을 얻어 국정 개혁을 주도하면서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기존 호족을 누르고 백성의 지위를 올리는 데 기여한다. 최영 등이 귀양가고 이성계,정몽주,이색 일파 들이 이 토양에서 등장한다. 또 서경(평양)천도, 충주천도 도 계획한다
역사는 왕권과 신권, 왕권과 기득권 세력이 어떤 상태인지가 항상 관건이다. 고려말도 반원 세력인 (공민왕) 왕실과 친원 세력인 권문세가의 갈등이 심했다. 지금도 대통령이 친미냐 친일이냐 친중이냐에 따라 기득권층과 화합이냐 갈등이냐로 나타난다. 기득세력과 결탁 여부에 따라 백성과 갈등여부가 새로운 형태로 표출된다. 이런 것들이 선거를 통한 표심이라고하나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국가가 형성되어 돌아가는 모습도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 프랑스, 문화역사학자) 의 '욕망의 삼각형'에 들어 맞는다. '보바리부인-삼류소설-연인' 처럼 '주체와 매개자와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굳이 지라르 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은 이 범주를 넘을만한 특별한 것이 없다. '돈-섹스-쾌락'도 삼각형을 이룬 욕망이고, 정치에서는 '기득권(주체) - 왕(매개자) - 백성(대상)'으로 재현된다. 이 욕망에서는 섹스든 정치든 본질적으로 종교적 지위를 갖는다. (할렐루야!) 기득권과 백성은 항상 상대적 관계이므로 왕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정삼각이냐 예각이냐 둔각이냐로 나타난다. 분명한 것은 다수의 백성이 뽑아준 왕은 항상 권리가 의무보다 더 많은 기득권과 결탁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결과는 권리는 없고 세금만 내는 백성쪽에 예각이 생긴다.
왕이 역정을 낸다는 것은 기득권과 불화를 뜻하며 그들의 반발은 왕에게 치명적이다. 이를 무시한 것이 개혁이고 혁명인데, 이가 성공된단들 또 다른 신흥 세력에 편승하고 백성과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다. 현대사에서 대전천도론을 주장하며 국민과 가장 가까웠던 노무현 대통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기득권에 의한 부동산 폭등으로 서민 삶만 피폐화되었으며 비극적 생을 마감한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끼리끼리 결탁이 극에 달했다. 박정희 대통령만이 권력을 기득권과 백성에 골고루 적용한 합리성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왕권을 능가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고 양인(良人)이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으며 성균관을 중건(重建)하고 공자를 국사(國師)로 격상시키는 개혁정책을 전개했으나 권문세족의 반격과 부정,부패,방탕,방만한 신돈에 부담을 느낀 공민왕은 그를 제거한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은 자신이 등용한 신돈을 자기가 죽인다.
이후, 병적인 착란증세를 보인 공민왕이 왕실출입 청년들에게 시해되고, 신돈의 여종(반야)에게서 낳은 아들(왕우)이 왕위를 계승해 우왕 이 된다. 우왕 과 최영 의 딸 사이에서 낳은 아들(왕창)이 창왕 이 되나,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씨 가 아닌 신우,신창 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살해되고 공민왕의 친척이 왕(공양왕)에 옹립되면서, 이성계는 폐가입진(廢假立眞) 명목으로 새 나라 설계를 마친다.
공양왕은 조선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1394년(태조3)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조선3대 태종16년 (1415) 공양왕으로 봉하고 경기도 고양현에 무덤(공양왕은 현재 삼척과 고양 두 군데 무덤이 있음)을 마련했다. 그러나 조선은 우왕과 창왕을 끝내 왕으로 추존하지 않았다. (후세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두 왕과 조선의 폐왕 연산군,광해군을 추존할 의무가 있다.)
조선 건국 후 한양천도
1392년 7월17일 고려국 35대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고려국 권지국사(高麗國 權知國事)' 칭호를 받는다. 이후 국호만 '조선국(朝鮮國)'으로 승인받아 1393년 2월 15일 개국하게 된다. (조선은 1392년 7월17일부터 시작됨)
한양은 고려때도 '남경(南京)'이라도 부른 곳으로 고려 중반부터 천도지로 자주 거론된 지역이다. 태조(太祖)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서 새도읍을 건설하기로 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덕(地德)이 쇠하여 새 왕조에 불길하다거나 전통적 반대세력을 개경에 남겨두기 위함이었다.
1394년(태조3) 10월,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악산과 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旺山)을 잇는 약 17km의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각기 구간을 맡아 해당 성벽에는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넣어 책임을 지웠으며 그 흔적들은 지금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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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부근 성벽에 새겨진 관직과 군명 ⓒ2012 서울포스트 자료 |
1395년에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개칭하고 1395년에는 한성의 행정구역을 정하였다. 1399년(정종1), 왕자의 난으로 다시 개경으로 옮겼으나 1405년(태종5)에 다시 돌아와, 이후 한성(漢城)은 조선의 수도로 확정되었다.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면모를 갖춘다. 성곽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인 유교의 오상 인의예지신(五常 仁義禮智信) 이념을 구체화하여 성문을 건축하였다. 즉, 중앙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보신각(普信閣)을 세우고, 동쪽에는 흥인문(興仁門), 서쪽에는 돈의문(敦義門), 남쪽에는 숭례문(崇禮門), 북쪽에는 숙청문(肅淸門)을 세웠다. 북쪽은 본래 소지문(炤智門)으로 하려했으나 최종적으로 숙청문(肅淸門, 현재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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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게 본 북한산국립공원. 좌로부터 노고산, 도봉산, 북한산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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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 북악산이 보이고 인왕산에 새 돌을 놓은 서울성곽이 빛난다. 안산에 이어 남산 타워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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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 와 한강 건너 관악산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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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계양산과 우측 멀리 강화도 마니산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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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재건된 '幸州大捷碑'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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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때 세워진 대첩비. 시멘트만 덕지덕지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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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잣 을 문 청솔모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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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1월. 행신리에서 서울을 드나들며 건넌 창릉천. 온통 하얀 눈이 쌓여 깨끗하게 보인 북한산. 그땐 국립공원인지도 몰랐고.. 아래 창릉천은 북한산 사기막골과 산성계곡 등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채워져 한강으로 흘러든다. ⓒ서울포스트 |
* 1. 참고할 사항(수자는 시간순)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연장)
- 임진왜란 3대대첩 : ① 진주대첩(1592년 10월(선조 25) 1차, 경상도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 1593년 6월 2차때는 창의사 김천일 등이 대패), ②한산도대첩(1592년 7월, 경상도 통영 한산도, 이순신,원균 장군), ③행주대첩(1593년 2월, 경기도 행주,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
- 임진왜란 해전3대첩 : ①한산도대첩(1592년 7월, 경상도 통영 한산도), ②명량대첩(1597년(선조30) 9월, 정유재란, 전라도 진도 울돌목, 12척으로 133척을 격파한 해전,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다'로 유명), ③노량대첩(1598년 11월, 정유재란, 경상도 남해,하동 해협, 이순신 장군 전사)
- 임진왜란 육전3대첩 : ①연안대첩(1592년 8월, 황해도 연안, 초토사 이정암), ②진주대첩(1592년 10월 1차, 경상도 진주), ③행주대첩(1593년 2월, 경기도 행주)
- 한민족4대첩 : ①살수대첩 (612년, 청천강, 을지문덕장군과 수나라), ②귀주대첩 (1018년, 강감찬장군과 거란), ③한산도대첩 (1592년, 이순신,원균장군과 왜군), ④행주대첩 (1593년, 권율장군과 왜군)
* 2. 참고할 사항 - 신돈 (검색)
1322년 신돈은 경상도 영산현(靈山縣) 사람으로 증문하좌정승(贈門下左政丞) 도첨의(都僉議)에 추증(追贈)된 아버지 신원경(辛原慶, 또는 다른 신씨)과,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의 사비(寺婢)인 어머니 박씨 아들로 태어났다. 모계(母系) 탓에 신분상으로 천한 처지에 있어 산방(山房)에 거처하다 떠돌이 승려가 되었다.
신돈은 평소 마른 몸매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사철 누더기 옷을 입고서 살았다. 여자들은 신돈을 신승(神僧)이나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인 문수 후신(文殊 後神)이라고 찬미했고 백성과 비복(婢僕)들은 성인이 오셨다고 찬양했다. 당시 생불(生佛)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영산현까지 직접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한 공민왕은 신돈의 달변에 매료되었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개경의 현화사(玄化寺)의 주지로서 부임하였다.
공민왕1354년(공민왕 3년)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王師)로 임명했으나 비녀(婢女)의 아들이었던 그의 신분을 문제 삼은 권문세족이 반발한 탓에 입궐할 수 없었다. 당시 공민왕은 왕사(王師) 보우를 통해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이 때 신돈은 공민왕의 측근인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정식으로 개경 왕궁에 출입하면서 공민왕과 만나다가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공민왕은 전일 어떤 사람이 칼을 빼들고 자신을 찌르려고 할 때 어떤 승려가 다가 와 구해 주는 꿈을 꾸었는데 다음날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와 인사시켰다. 신돈은 총명하여 공민왕에게 중망(重望)받았고 공민왕 자신이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불교에 관련한 일로 신돈을 자주 입궐시킬 수 있었으나, 신돈의 명성과 특이한 성격과 낡은 사회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태도에 대한 반발과 의구심과 편견이 심한 한편으로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필히 이 중놈이리라!”라는 근거 없는 비산(誹訕)도 있었고 무장인 정세운(鄭世雲)은 요승(妖僧)이라 하여 신돈을 살해하려고 시도하여, 공민왕이 그를 직접 피신시키기도 하였다.
1364년 두타승(頭陀僧)이 되어 공민왕을 내알(來謁)하고 비로소 궁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후 호 청한거사를 받는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국정을 자문받아 따르지 않는 바가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추종자가 갑자기 늘게 되었다.
신돈(辛旽)은 왕의 국정 자문역을 하면서 이인복, 최영, 이구수(李龜壽)를 밀어내고 1365년에 정계 핵심세력으로 부상한다. 공민왕은 신돈이 여타 신하와 달리 파당에 속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이 없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여, 전면에 내세우고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한다.
1365년 2월 만삭의 몸이던 왕비 노국대장공주는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신돈에게 정권을 내맡겨 조신(朝臣)들을 견제하게끔 하고서 자신은 불사(佛事)에 전념한다.
1365년(공민왕14) 7월, 신돈은 봉작(封爵)인 진평후(眞平侯)를 받고 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 壁上三韓三重大匡 (벽상삼한삼중대광) 領都僉議使司 (영도첨의사사) 判監察司事 (판감찰사사) 鷲城 (취성) 府院君 (부원군) 提調僧錄司事 (제조승록사사) 兼 (겸) 判書雲觀使 (판서운관사)에 임명되어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개혁하는 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 폐단을 타개하고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인사권을 위시해 내외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서 승복을 벗고 환속, 속명(俗名)인 돈(旽)을 사용한다.
신돈은 공자를 천하 만세의 스승이라 선언하고 공자를 불타와 함께 국사(國師)로 존숭케 하였다. 1367년 공민왕에게 명령받아 성균관을 중건,개축,보수하였으며, 신진사대부의 지도자인 이색 을 적극추천하여 성균관 대사성으로 발탁되게 힘썼다.
이후 성리학의 이념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개혁 성향이 강한 신진 유학자인 정몽주, 정도전을 후원하여 이 사람들이 성균관을 근거로 삼아 관직에 진출할 길을 열어 주었다. 신돈이 일련의 개혁정책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하자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극심했다.
신돈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하려 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이것은 권문세족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이자 민간경제를 활성화시킬 유일책이었다. 또한 그것은 결과로 권문세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런 신돈의 개혁정책은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로 구체화한다.
1366년 5월 신돈이 토지개혁을 주관하는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와 노비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이는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백성의 소속을 바로잡는 관청으로서, 광종 이후 폐지된 노비안검법의 부활이다. 신돈은 민중으로부터 성인으로 칭송받았으나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廉興邦)을 위시해 농장주이자 권문세족, 친원 세력들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1367년 말 신돈은 신라 말기 고승 도선의 저서 『도선비기』(道詵祕記)를 근거로 하여 공민왕에게 다른 지역으로 천도하자고 건의하고 서경을 길한 곳으로 택하여 스스로 서경에 가서 상지(相地)까지 하였지만 개경에 경제 기반을 둔 귀족들이 반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신돈의 힘이 날로 기세를 떨치자 공민왕의 모후(母后)인 명덕태후(공원왕후) 홍씨를 비롯한 왕실 세력과 문신들의 우려가 높아갔지만 공민왕의 신뢰는 여전하여 오히려 그 비판 세력들이 제거당했다. 그래서 1370년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보낸 친서에서 공민왕을 고려 국왕이라 칭하고 신돈을 상국으로 부를 만큼 신돈의 위세는 공민왕 못지않게 대단해졌다. 그러나 신돈의 세력 확대는 공민왕에게도 부담될 정도에 이르렀다.
이제현은 관상을 볼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공민왕에게 여러 번 참소(讒訴)하면서 '신돈의 골상(骨相)은 옛날 흉인(凶人)의 골상과 같아 후환이 있을 듯하다'라고 '공민왕에게 신돈을 가까이하지 말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1366년 간관 정추(鄭樞)와 경주 사람 이존오(李存吾)는 신돈를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공민왕에게 폄축(貶逐)당하기도 하였으나 공민왕의 각별한 신임을 확인한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계속 공격한다.
1367년 10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과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하고 추천했던 김원명까지 가세하여 신돈을 제거하려고 비밀리에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파직당하고 장류(杖流)당하였다. 1368년 10월에는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이 신돈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다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장류(杖流)되던 도중 모두 살해되었다.
또한 기존 승려들이나 귀족 출신 승려들도 신돈을 안 좋게 보고 폄하하였다. 명덕태후의 친척이기도 한 보우는 신돈을 권력에 맛을 들인 사승(邪僧)으로 지목하여 비난하기도 했다.
신돈은 환속한 뒤에 한동안 기현(寄顯)의 집에 기거하였고 그 뒤 1367년 사택(舍宅)을 얻어 독립하면서 타락한 모습을 드러내보였다. 많은 첩을 거느려 아이를 얻는가 하면 주색에 빠져 드는 일이 잦아 조신(朝臣)들이 비판할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돈이 환속한 신분으로서 축첩(蓄妾)했으므로, 반론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상과 목적을 급하게 실현하려는 개혁은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을 위시한 상층 계급의 맹렬한 반감을 사기 마련이다. 권문세족들은 신돈이 간통했다, 왕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했다, 집이 일곱 채이며 뇌물을 받았다는 등 부정축재 문제, 환속한 이후에 아내와 첩을 두고 아들까지 얻었음에도 여자를 가까이 하고 음란하다,는 등 맹공격하였다. 신돈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두 번 신돈의 집 담장을 넘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1367년 신돈이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에 올라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한 것은 공민왕에게도 공포심과 의구심을 심어 주게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면서 개경에서 충주로 천도할 계획을 건의하였으나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이 결사반대하여 무산되었다.
1369년 초 신돈은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고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공민왕과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때부터 공민왕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공민왕은 마침내 1370년 10월 친정(親政)할 뜻을 밝히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과도하게 성장한 신돈의 세력은 공민왕의 친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임견미와 염흥방(廉興邦) 세력은 신돈을 역적이라고 누명을 씌워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7월,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選部) 의랑(議郞)인 이인(李韌)은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이름을 속이고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글을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몰래 보냈다. 김속명은 이를 공민왕에게 보고했고 신돈은 곧 공민왕을 살해하려는 역모 고변에 휘말려, 수원부(水原府)에 깊숙이 갇혀 있다가 2년 만인 1371년(공민왕 20) 7월 기현(寄顯)·이춘부(李春富)·이운목(李云牧)과 함께 형장(刑場)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향년 49세였다.
신돈 사후 조선왕조 오백 년간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후손이라는 설이 퍼졌다. 이는 공민왕의 후궁이자 우왕의 생모인 반야가 신돈의 시비(侍婢) 출신인 사실을 근거로 하였으며, 조선의 개국을 합리화시키려고 성리학자들이 날조하였다. 우왕과 창왕의 신돈 후손설은 조광조가 비판한 후 송시열이 재비판하였다. 그 뒤 1910년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신돈 후손설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조작한 설로 인정되었다. 신돈의 후손이라는 의혹(疑惑)이 나타날 것을 염려했던 공민왕은 아들 모니노(牟尼奴, 후일 '우' 로 고침)를 반야의 아들이 아닌 이미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신돈은 이후 개혁주의자로 인식되기보다는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국정을 문란케 한 간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인식시켜 조선조의 성립을 합리화하려 했던 조선 개국 세력의 역사 왜곡 작업에서 비롯된 일이다.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 내내 보우(여기서의 보우 는 려말 태고사를 창건한 보우 가 아니라, 조선 중기 명종때의 보우 임) 와 함께 전형이 될 만한 요승으로 매도당하고 비판받아 왔다. 1970년 대 이후 신돈을 다룬 재평가 여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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